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정판사 위조지폐 사건 (문단 편집) === 정세: 냉전의 시작 === >일제의 식민지 국가의 황국신민으로 고통받았던 한국인들은 1945년 8월 15일 일제 천황이 공식적으로 무조건 미국과 연합국에 항복선언을 함으로써 해방되었다. 그러나 공식적으로 해방되기까지 3년이 걸렸다. 일제 식민국가의 자리에 점령군인 미군이 지배하는 미군정이 새 국가를 1948년 8월 15일 공식 출범시킬 때까지 미군정이 한국인들을 지배하는 아메리칸 임페리움(American Imperium)의 국가지부였기 때문이다. (중략) 미소공동위원회의 결렬은 한반도에 관한 두 초강대국인 미국과 소련이 타협책을 마련하는 데 실패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중략) 5월 15일 정판사 사건이 났고 5월 18일에는 해방일보가 정간되고 조공 본부가 수색을 받았으며 8월 16일에는 경찰이 전평 서울 본부를 수색하였고 (중략) 이는 트루먼 대통령이 롤백정책을 천명했을 때부터 예견된 일이었다. 일방적인 대소 봉쇄정책이 심화될수록 좌익세력에 대한 탄압과 배제는 도를 더해 갔다. >---- >임혁백, 2014. 《비동시성의 동시성》. 156~169쪽 김경일 교수에 따르면 [[일제강점기]]의 조선공산당 재건운동은 식민지의 노동자, 농민에 대한 헌신이라는 대의를 표방한 거의 유일한 대안이었다.[* 출처: 김경일, 이재유 나의 시대 나의 혁명] 독립운동 공로를 대중에게 인정받아 광복 후 조선공산당은 '''합법 정당이자 최대 정당'''이 되었다. 같은 시기 반파시즘 투쟁 공로로 [[프랑스 공산당]], [[이탈리아 공산당]]이 잘 나간 것과 비슷한 현상이다. 따라서 조선공산당은 선거를 통한 정부수립을 원했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무방비도시고문.jpg|width=100%]]}}}|| ||영화 [[무방비도시]] 속 나치에게 고문당하는 이탈리아 공산당원. 조선공산당 독립운동가들도 이렇게 일제에게 고문당했다. || >평화혁명론은 평화적인 방법으로 국가권력 장악을 지향한다는 점에서 선거주의 이행노선에 가까웠다. >(중략) >정판사 위조지폐 사건은 미군정의 조공에 대한 정면공격이라는 점에서 협조전술이 현실에서 유지되기 어렵다는 것을 증명한 사건이었다. >---- >김무용, 해방 후 조선공산당의 노선과 국가건설 운동, 2005 그러나 좌익에 불리하고 우익에 유리한 사건이 연달아 발생하였다. 한편 [[미군정]] 사령관 [[존 하지]]는 우익단체인 독립촉성국민회를 결성하게 했다. >조봉암 사신이 신문에 연재되는 동안 미소공위 휴회, 정판사 ‘위조지폐’ 사건, 여운형 동생 여운홍의 인민당 탈당과 사회민주당 창당이 연이어 발표되었다.(중략) 이 일련의 사안들이 좌익을 분열시키고 공산당 지도부의 권위를 실추시켜서 그 영향력을 약화시키려는 뚜렷한 정치적 의도와 목표를 가지고 전개되었다. >---- >[[정용욱]] 서울대 국사학과 교수[[https://hani.co.kr/arti/culture/religion/904382.html|#]] >정판사 사건은 한반도에서 냉전이 시작됐음을 알리는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의 승리를 이끌어낸 힘은 파시즘에 반대하는 국제적 연대였고, 8·15 해방은 그 소산이었다. 이 국제적 연대는 해방 이후에도 한동안 지속됐으나 존속 시기가 너무 짧았다. 불과 9개월에 지나지 않았다. 제1차 미·소 공동위원회가 결렬되고 정판사 사건이 일어난 1946년 5월은 냉전시대의 개막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 >[[임경석]], <임경석의 역사극장: [[https://h21.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52349.html|냉전시대 명변론의 대가는 처절했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